수평 이동, 결정권, 크랍슈타트
의심하는 행위로서 거대 기관을 상대하기
화산은 산책할 수 없음 (화산 ≠ 산책)
문과 이동
지리학 클래스로서의 KEC(크럅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 도면(floorplan)
수평 이동, 결정권, 크랍슈타트
에바 에인호른, 쥬노 JE 김의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2020)는 하나의 게임만은 아니다. 크랍슈타트를 통해 제작되는 작업은 그들이 말하듯 하나의 가상 국가(fictional country)이자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이다. 한 차원 나아가 리얼리티 자체다. 외부의 목소리를 모으고, 공유하는 형식으로서의 그것은 세계를 뚫고 나가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커리큘럼, 제안서, 사회학적 보고서, 메니페스토, 장난끼 어린 작전들이다. 에바와 쥬노가 만들어내는 제작물은 ‘두 개의 젓가락으로 피아노치기’ 같은 협업을 통과한다. 이를 통해 관객, 플레이어, 동료는 그들의 시간을 ‘크랍슈타트’와 함께 보내게 된다. 크랍슈타트와 함께 시간 보내기! 그것은 미술 작업인 동시에 게임, 리얼리티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크랍슈타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크랍슈타트> 시리즈들은 ‘하우 투’를 알려주는 솔루션이자, 대책 없는 시스템을 상대해내는 매뉴얼이다. 때로 그것은 완성된 게임이자 필름 프로젝트이다. 어디로 갈지 명확한 방향을 선언적이면서도 유희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이상한 협업체이다. 나는 <크랍슈타트>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를 하나의 전시이자 영화관이며 입체적인 ‘조작(manipulation)’의 연속체로 본다. 그곳 안에는 내러티브가 있고 산(mountain)이 있고 실내 인테리어가 있다. 집안에 있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사이의 이동과 ‘통과(pass)’ 시스템이 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리면 끝난다. 무엇이 끝날까? 진입과 통폐합, 발전 가능성과 회원 가입을 통해 어느 시스템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진입 가능성이 그것이다. 여기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고 공간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업그레이드되는 시스템 대신, ‘대안적 서사’의 가능성이 논의된다. 이 게임/전시 안에서 강력한 시스템(국가, 연봉, 정책, 성별 등)은 배경처럼 스며들어 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될 때의 생물(bio)적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것처럼, <크랍슈타트>에는 많은 것들이 블랙 유머, 재가 되어 승화된 ‘그레이 유머’로 스며들어있다.
<크랍슈타트>의 ‘그레이 유머’는 유머를 둘러싼 이분법적 시각을 돌파(교란)한다. 흔히 유머란, 완전히 비어있는 채로 웃기거나(텅 빈 100% 유머), 그 안에 뼈가 있어서 푹 찌르는 맛을 지닌 비판적 유머(블랙 유머)로 나뉜다. 그러나 이들이 펼치는 유머란 어딘가 회색조를 띤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북유럽의 날씨와도 같은 것인지, 이들의 유머는 감각적으로도 들뜨지 않고 가라앉아 있으며, 다루는 텍스트적인 면모에서도 유희적인 것과 규칙적인 것(통제적인 것) 사이를 오간다. 즉 내가 <크랍슈타트>를 생각하며 만든 용어인 ‘그레이 유머’는 유머의 강도나, 유머를 구사하는 주체의 문제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유머 안에 다른 말을 하고싶은 의도가 있는가, 아니면 웃기면 끝인 개그인가? 또 누가 누구를 웃기는가? 함께 웃는가? 따로 웃는가?
그것은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딱히 깔깔깔 웃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만은 아니다. 비판적 시야를 확보한 거리감으로 인해, 그것은 니(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마음을 가진 이상한 공간이 된다. 나는 이것이 전시가 주는 특권이자, 게임이 만들어놓은 시공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느끼는 어떤 ‘안전막’이라고도 느낀다.
다시 내가 보고 있는 그들의 게임 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에 구축된 공간은 수평적이다. 게임 속 등장인물들이 가로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게임 행위자로서의 ‘나’를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옆으로 움직이는 것은 정면을 향해 돌진하는 ‘문제적인 주인공 주체(subject)’의 정신과는 멀다. 게임 속 인물들의 몸짓을 보자. 도시 안에서 걸어가는 방식에 따라 남녀, 지위, 성격 등을 알아차렸다고 하는 중세의 유럽이 떠오른다.[2] 이들(캐릭터)의 육체와 사고는 크랍슈타트적인 시공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약간은 수동적으로, 약간은 이행적인(transitional) 상태로, 게임 속 인물은 그야말로 사변적(speculative)이다. 우리는 같이 추측하며 나아간다, 아니 출입구가 허용하는 만큼만 움직이고 검토하며 서로의 검토 대상이 된다. 컴퓨터 게임 안에서 무기도 승리 의지도 없이 화면에 내동댕이쳐진 인물은 생소하다.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안, 그러니까 북구의 어떤 마을 안, 그 안에서 행위자는 여러 기관(institution)을 상대하는 개인이다.
의심하는 행위로서 거대 기관을 상대하기
거대 기관, 거대 국가를 상대하는 개인에게 허락되는 것은 의심하는 행위이다. 질문을 만들기보다는 선택지에 답해야 한다. 주어진 두 편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게임 속의 인물은 크랍슈타트 시공간, 그리고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 안의 행위자(agent)이다. 마우스를 조작하는 나는 이 게임/세계를 컨트롤하는 행위자인 동시에 목격자가 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정보 게임이 몇 단계에 걸쳐 이뤄지든, 목격자는 행위자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므로, 의사소통 과정 초기의 비대칭성이 유지된다”고 쓴 바 있다.[3] 행위자보다 목격자가 유리하다는 말을 천천히 의심해보자! 우리는 이 말을 여러 방식으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격자는 여러 행위들을 반복해 관찰함으로써 사람들의 경험을,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로서 다룬다. 기계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정답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행위자는 혼자 걸으며 혼자 몸소, 다소간은 비효율적으로 결정한다. 그에게 데이터베이스란 스스륵 사라져가는 담뱃재 혹은 녹아버리는 손바닥만한 눈사람 같은 것이다. 개인에게 결정은 거대 기관을 상대하는 절대적인 방식이다. 1960-70년대 많은 예술가들이 말했던 ‘비결정성(indeterminacy)’ 또한 ‘결정하지 않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정한 결정이었다.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의 플레이어인 우리는 행위자이며 목격자이다. 우리는 하나 하나 배워가며 공간의 수평적 이동을 바라본다. (게임의) 최종 결말을 모른 채로, 이 인물이 도서관의 사전을 얻게 되면서 영어 말하기 능력을 ‘겟(get)’ 하는 순간을 본다. 화산어(Vocanish)와 짧은 영어를 하는 게임 속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은 ‘이동한다’는 점이다. 앞서 적었듯이, 약간은 사변적이고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45도 갸우뚱하며 끌려가는 듯 느릿느릿 무언가를 지연시킨다. 바다 근처의 게처럼, 혹은 전시장의 사이즈를 재기 위해 두 팔을 벌린 사람처럼 간다. 이 가로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수평적인 시공간의 분할 속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사이드 뷰’ 게임은 X축만 이동 가능한 게임이다.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에 사는 인물은 좌우로 이동한다. 이때 그들의 얼굴은 정면을 향한다. 흡사 이집트 벽화 인물의 얼굴이 정면성을 띠고 사냥하러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약간 게슴츠레한 눈빛, 겨울 털옷을 입고 고개를 갸우뚱 흔들면서 불이 있는 화산과 상대하는 이들은 쥬노 김과 에바 에인호른이 설계한 시스템의 인공물(바의 커피잔, 테이블, 도서관 책장 등), 자연적 실체(산, 땅,연기)들 사이를 오간다. 여기서 일어나는 수평적인 이동은 수직적인 이동과 다르다. 그것은 계층이 있는 대상의 정복이 아니라, 이질적인 시스템들을 ʻ방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단테의 「신곡」에서 보여주는 천국과 지옥의 위계와 다르게, 어딘가로 오를 수 없는 수평적 이동은 불투명한 문들을 통과하며 움직인다. 그들은 검색, 통합, 대출, 인증 시스템을 통과하며 이질적인 대상들, 그것이 공간이든 어떤 무드(mood)든지간에 잠깐씩 방문한다.

화산은 산책할 수 없음 (화산 ≠ 산책)
한편 다른 시공간을 이동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선생, 안내하는 목소리, 선행 여행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문헌들에서 언급되어 왔다. 1968년도 작가 백남준이 쓴 글 「종이 없는 사회의 확장된 교육」을 살펴보자. 그는 오디오 테잎, 슬라이드와 비디오 테이프 등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미래에는 교실 교탁 위의 교사가 아니라 새로운 교육 센터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가 쓴 글이 냉전(cold war, 1968년 작성) 시기의 글을 증명하듯 “CIA와 같은 아카이브 센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쥬노 김과 에바의작업을 관측하는 나의 글에 백남준의 글을 가져온 것은 ʻ산책(scroll)’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백남준은 미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행한 3개월 간의 연구에서 새로운 아카이브 센터를 상상했다. 도서관의 모든 사서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많은 공간적 이미지들을 꺼내왔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사르트르의 「구토의 표본 도시로서 부르쥬」, 프루스트의 「파릉사 풍경」 바소의 「오쿠노 호소미치」 등을 비디오로 녹화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생들은 안내자의 부드러운 설명과 함께 문학적인 산책(a literary stroll)을 경험하며 외국어도 학습할 수 있다”(백남준)[4]
“예를 들어 교토의 돌정원의 경우 시간이나 날씨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지속적으로 변하는 유리창과 돌의 색깔은 안내인의 수다스런 설명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고 샤르트르는 말했다.” (백남준)
당신은 어떻게 여행하는가? 백남준이 언급한 영상 위에 달라붙은 ʻ안내자의 부드러운 설명’은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 일을 종합된 경험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루트가 있는 여행(산책, 투어)의 방식이다. 우리(행위자/관찰자)는 움직일 수 없고, 부드러운 안내자의 설명과 이미지의 흐름을 통해 ʻ대신 경험’ 하는 일이 가능하다. 교토의 돌 정원,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어떤 산들, 변화하는 도시들의 이미지를 담아, 목소리가 앞서 보았던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에 등장하는 것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화산어)이다. 북구의 화산과 기관 건물, 실내를 배경으로 한 이 공간을 지탱하는 것은 안내가 아닌 ʻ선택’이다. 이 언어(화산어)는 크랍슈타트가 만든 이미지와 세계관을 안내로서 통합시키지 않고, ʻ분산’시킨다. 그것은 대리 여행이 아니라 직접 실행시켜보는 ʻ경험’이다. 여기에 있는 것을 바로 저기에 이식시킨듯한, 원래 있었던 공간의 원본은 북유럽에 가야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 앞에 있다. 눈앞의 모니터에서 움직이는 수평적 화면,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되는 텍스트 대신, 게임 속 인물들의 대사를 선택해 나간다. 그럼으로써 이 마을과 지구의 분노 게이지 그리고 결과를 위치 짓는다. 이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기본적인 뼈대로서 ʻ프로토콜’이다. 이 언어는 설명이 아니라 지시어이며, 개인의 결정을 이끈다.
크랍슈타트가 만든 ʻ화산어’는 그 언어명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듯, 마치 화산에서 나온 부산물이 청각적으로 치환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를 작동시켜 참여해보는 일은 디지털 환경 안에서의 새로운 시청각적 경험을 자극한다. 지그르르 불타오르는 불 사운드의 기계적인 묘사와 북유럽의 어느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사운드)에 ʻ동기화’된 인물들의 정신이 이 마을에 떠다닌다. 화산에서 나오는 지글지글한 소리가 화산에 호텔을 건설할 것이냐, 화산으로 하여금 마을을 불태우게 할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다. 분노 게이지를 조절하는 막대기(바 Bar)는 온라인 화면 안에서 느낄 수 없는 온도를 간단한 픽토그램으로 제시한다.

문과 이동
이때 문이 있다. 마치 작가 쥬노 김이 그의 일련의 작업들에서 공간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그러하듯,[5] 게임 속 시공에 등장하는 하나의 문으로 바(bar)가 있다. 이 바(bar) 안의 인테리어는 익스테리어와 분할된다. 분할시키는 무드, 그것은 배경 음악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간을 지배하는 음악이 루프(loop)된다. 여기서 사장, 매니저, 서빙 아르바이트 등은 정면을 보고 차를 마신다. 다른 문으로서 도서관 출입문이 있다. 아카이빙 시스템이자 대출 순환 시스템으로서 도서관은 사회의 지배 구조와 유사하다. 번호를 매기고 계층을 나눈다. 도서관 사서가 하는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책이라는 공공재가 개인의 것으로 잠시 뒤바뀔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반납할 것.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의 또 다른 문은 이글루의 문이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연습에서 큐랍슈타트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또 하나 물질의 언어를 가져온다. 액체, 고체, 그리고 기체. 이 세 가지 물질의 기본 상태가 크랍슈타트의 이글루에서 작동한다. 크랍슈타트를 한국의 운세, 풍수지리와 잠시 겹쳐 읽어보며 우리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한국, 보다 넓게는 동아시아에서 ʻ풍수지리’란 바람과 물을 뜻하는 ʻ풍수’ 즉 물리적인 지리적 요소가 특유의 방법론으로 외부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이때 풍수지리의 땅이 가진 ʻ기후와 풍토’는, 외부로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ʻ눈에 보이지 않는 영험한 기운’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땅 속에 어떤 기운들이, 일정한 루트를 따라 돌아다닌다고 여겨진다.
이동은 성장의 기본 조건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사주팔자라는개념이 있고, 육십갑자에 의해 돌아오는 몇 번의 생일을 기념한다. 동쪽으로 가면 행운이 오고, 남쪽으로 가면 3년 동안 운이 끔찍하게도 나쁜 ʻ삼재(三災)’라는 개념도 있다. 한자어 ʻ재’는 불(화)을 의미하는 글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다. ʻ삼재’는 나쁜 기운이 세 번 온다는 뜻이 아니라(여기서 삼은 한국어로 숫자 3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쉽게 오해를 살 수 있다), 나쁜 기운이 세계의 근본적인 것 물, 불, 바람에서 온다는 의미다.[6] 2022년의 한국 사람들은 이 의미를 정확하게 외우고 있지는 않지만 겨울이 되면 과일 중 수박도 사과도 아닌 귤이 먹고 싶은 것처럼, 일종의 분위기와 상식으로서 ʻ삼재’에 관해 알고 있다. 특정한 해에 ʻ삼재에 있다’고 하면 기운 빠진 한 해이다. 사고나 재앙일 수도 있고 운수대통이 아닌, 무엇을 하든 일종의 승산과는 거리가 먼 것을 뜻한다. 의미의 차이는 있으나 ʻ개념의 반복이 특정한 의미를 부가한다는 것’은 모든 언어권에서도 동일한 듯하다. 불을 뜻하는 글자가 두 번 반복됨으로써 재앙의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마다 다른 계절이 있고 다른 땅이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을 하며 살지만 ʻ두 번 반복’이 의심을 살 만한 행위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 수 있다. 똑같은 말을 두 번 한다면 의심해보자.
지리학 클래스로서의 KEC(크럅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 도면(floorplan)
나는 이제껏 크랍슈타트의 여러 작업 중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를 통해 이들의 공간, 수평적 이동, 문과 이동에 대해 말했다. 이제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의 지리학(geography) 수업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쥬노와 에바의 작업에 깃든 지리학적인 고찰이 그들의 작업을 첫째 북구의 바깥으로 뻗어가게 하며 둘째 서구 남성 지식인 중심의 전통을 그레이 유머로 재조직한다는 전제 아래, 나는 이 지리학 수업이 여전히 미술에 대해 재고함과 동시에 다른 ʻ땅 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인트로덕션 : 지리학 입문]
일단 지리학에 대한 이야기부터. 지리학은 지표 현상을 백과사전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지리학이란 지표면에서 전개되는 현상들의 지리적 공간적 특성을 파악하며, 이를 통해 다른 지역들과의 차이를 고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플랫폼 중 하나인 네이버(naver.com)는 ʻ한국학중앙연구소’의 백과사전을 인용해 지리학의 목적을 이렇게 전한다. “지형에 형성된 유형(pattern)을 찾아내고 이 유형이 만들어지는 과정(process)을 밝히고자 한다”.[7] KEC의 지리학 시간에는 유형에 깃든 과정을 탐구하며 코레오그라피, 자기 마을 말하기, 관찰하기, 나라 이름 대면서 싸우기, 나에게 의미있는 동네에 관심 없는 친구를 데리고 같이 가보기 등등등 무한하다. 내 땅에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 권력과 ʻ무관한’ 땅의 존재에 대해 알릴 수 있으며 그것은 돌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형태의 ʻ역사 주입’과 달리, 실제 날씨를 느끼며 땅의 기운에 대해 느껴볼 수 있게 한다.
KEC에서도 땅은 중요하다. 지리학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ʻ땅’ 그 자체이다. 그 위에 어떤 지명이 붙고 무엇으로 불려 질지는 알 수 없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보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유독 손으로 그린 지도가 기억에 남는다. 1983년 한국공영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려져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손으로 그린 지도를 가지고 나왔다.[8] 그들은 잃어버린 가족의 이름과 살던 마을에 대해 말했다. 그 손에 물질적 증거로서 자신이 기억하는지도가 있었다. 옆에 개울이 있고 낮은 산이 있으며 저기 오리들이 둥둥 떠다닌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마을이었지 그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되지 못 했다. 애칭으로 불렸던 마을의 한 장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친구가 살았던 붉은 지붕의 집은, 개인적인 맥락을 기억해낼 뿐 과거 구체적인 지명에 대한 정보는 아니었다.
[쓰기, 걷기, 보면서 걷기]
쓰기, 걷기, 보면서 걷기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다.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 그러면서 ʻ보는 위치’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여행, 투어하기, 루트, 가이드 투어 등은 다른 시간대에 그 이야기가 전해지며 ʻ다시 쓰기(choerography/geography)’가 된다는 사실이다.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지리학은 글 쓰기 수업과 연관된다.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지리학은 걷기와 연관된다.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지리학은 ʻ보면서 걷기’, 두 가지 행위를 동시에 하기와 연관된다. 크럅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지리학은 ʻ다른 나라에 대해 질문하기’와 연관된다.
[지리학 : 이름 붙이기]
쓰기의 행위는 이름붙이기와 연관된다. 화산어의 언어가 어떤 이름도 쉽게 붙이기 어렵게 하는 것처럼, 때로 우리는 이 ʻ이름 붙이기’ ʻ명명하기’ 행위에 대해 재고해보고 토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름 붙이기는 별자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인류가 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 하나의 대상을 두고 동상이몽(다른 꿈 꾸기)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의 지리학 수업에서는 각 지역마다 천문대를 방문해 별자리의 보편성과 차이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각 나라 어린이들에게 공룡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공룡의 이름에 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지도 풍부한 예제와 도판을 제시하며 찾아보게 하자. 천문대를 우리의 장소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전 세계 천문대에서 하늘을 향해 별자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레이저 포인터를 쏜다면, 그 경관이 무척 우스광스럽고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리학 : 도면 만들기]
또 하나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우리는 도면에 대해 사고하며, 게임, 전시, 공간, 도서관 등의 물리적 구조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파괴하고 재건설할 수 있다. 먼저 도면에 대해 생각해본 나의 생각을 공유한다. 전시장에 놓인 도면은 오늘날의 새로운 양태의 미술 전시 형식을 관찰하는 매개체다. 도면은 전시장에서 정보 전달 역할을 실행하며 동시에 전시가 끝난 후에 유효한 기록물(증거)이 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이때 미술사와 미술 현장에서 이론가, 작가들에 의해 논의되어 온 ʻ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 아이디어는 도면이 내포한 미술 공간에 대한 인식과 전시 형식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ʻ벽 없는 미술관’은 앙드레 말로의 ʻ상상의 박물관’을 지나 ʻ벽 없는 미술관’(로잘린드 크라우스)를 거쳐 온라인에 위치한, 저작권이 불분명하며 원본 복제의 개념을 뒤흔드는 또 다른 감각의 복사물들(『부바르와 페퀴셰』)과 연동된다. 전시장 도면은 전시장에 놓여 작품의 위치와 상세 캡션을 알려주는 수단만이 아니다. 전시장에 놓인 도면은 그 자체로 인쇄된 ʻ벽 없는 미술관’이며, 물리적으로 또 다른 사적 공적 미술관과 방법론을 구현하는 지지체(technical support)가 된다. 한편 도면은 ʻ벽 없는 미술관’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공간, 장소, 지리학에 대한 신선한 생각을 함으로써 꿈에서조차 흥미로운 공간을 방문하고 찾아가 보기 위한 하나의 훈련 도구이다.
「크랍슈타트」 그리고 「아라비아타는 임금상승을 원한다! Krabstadt-Arrabbiata wants a raise!」에서 빠져나온 행위자/목격자의 경험은 한 장의 지도로 압축되지 않는다. 기억은 총체적이다. 이미지와 더불어 게임 속 인물의 몸짓과 배경음악으로서의 사운드가 맴돈다. 마우스를 클릭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정지화면에서 갑자기 조금씩 움직이기! 「크랍슈타트」의 지리학은 하나의 고정된 인스톨레이션이 아니라, 종종 걸음으로 제자리에 멈춰서 있기도 하고, 이동하는 게임 속 인물의 발동작으로 기억된다. ʻ헨젤과 그레텔’이 뿌려놓은 과자조각처럼 파편인 동시에, 이어보면 어딘가로 가는 지도가 된다. 「크랍슈타트」를 하나의 ʻ교육 프로그램’으로서 제시하는 쥬노김과 에바는 이를 수행적이고 연속적인 실체로 만들어간다. 그과정은 수행적이기 때문에 크랍슈타트 에듀케이션 센터의 지리학 교과는 하나의 지도로 압축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낯선 지형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어딘가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새로운 언어 체계로서의 지도 그 자체이다. ʻ지도’ 라는 말 자체를 바꿔 부르는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크랍슈타트」가 무엇이며 어디냐고 묻는 이들에게 일단 이 공기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해본다. 자, 이제 우리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무엇으로 할까?
글 현시원
Footnotes
- 필자가 쥬노 김에 대해 쓴 첫 번째 글 또한 여행과 여정, 다른 두 명 이상의 시점과 대화에 관한 그의 개인전 리뷰였다. 2010, 아트선재센터 글 ; 한편 2009년부터 협업을 이어온 에바와 쥬노에게 ‘크랍슈타트(Krabstadt)’는 그들의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이며, 단편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물이다. 이민, 통폐합, 실직, 섹스와 같은 주제를 풍자한다. 2020년 10월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컴퓨터 게임 버전의 〈크랍슈타트 버튼>(2020), 2016년 서울 통의동의 더북소사이어티 서점에서 작가 쥬노 김은 크랍슈타트의 첫 번째 필름 <고래 여인(Whaled Women)>에 대해 이야기했다.↑
- 리처드 세넷, 『살과 돌』, 문학동네, 1994(2021 재출간), 215쪽에서는 미로에 대해 설명한다.↑
- 어빙 고프만, 『자아 연출의 사회학』, 1959, 서울 : 현암사.↑
- 백남준, 1968↑
- 쥬노 김의 스크립트를 보라. 추상캐비닛 안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을 권한다. http://abstractcabinet.org/exhibition/goodday/ 화면에서 보이는 흰 바를 몇 번 클릭해달라. 쥬노김이 2020년 12월 작업한 영상을 볼 수 있으며 그 안에 공간을 묘사하고 증언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 http://mytemple.co.kr/bbs/board.php?bo_table=disasters&sca=%EC%82%BC%EC%9E%AC%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3F. 삼재는 12년을 주기로 찾아와 3년 동안 이어진다는 통설이 있다.↑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686647&cid=46618&categoryId=46618↑
- 아 방송은 총 435 시간동안 생방송 되었다. https://namu.wiki/w/%EC%9D%B4%EC%82%B0%EA%B0%80%EC%A1%B1%EC%9D%84%20%EC%B0%BE%EC%8A%B5%EB%8B%88%EB%8B%A4↑